하고많은 환상과 싸우며
바야흐로 나의 죄스럽고 지겨운 청춘은 죽어버리고,168 장년기로 접어들었습니다. 나이가 더할수록 (형이상학적) 공허169는 더욱 말 못할 지경이 되어, 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 본체를 개념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주여, 나는(예지에 대한 것을 약간 들은 뒤로부터) 당신이 인두겁을 쓰셨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생각을 멀리했고, 우리의 영성적 어머니인 당신 가톨릭 신앙에서 이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두고 달리 무엇을 개념할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인간, 이따위 인간으로서 당신을 지존⋅유일·진실한 하느님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 보았고, 진심으로 불후·불가침·불변하시는 당신을 믿었습니다.
어찌 되어 그런지는 알지 못해도 한 가지 밝히 보고 확신을 가지기는, 썩는 것이 썩지 않는 것보다 못하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은 침해받을 수 있는 것보다 물론 더 낫고, 아무런 변화도 받지 않는 것은 변화가 가능한 것보다 우세하다는 것이었습니다.170
내 마음은 하고한 환상과 싸우며 부르짖고, 이 일격으로 나의 안광에서 주위에 맴도는 군상을 쫓아버리려 애썼으나 쫓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또다시 몰려와 내 얼굴을 뒤덮고 흐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당신이 분명 인두겁은 아니시되 썩을 수 있고 침해될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것보다 나으신 줄로 알던 불후·불가침·불변하신 당신일망정 마치 어느 형체인 양 우주 안에 두루 스몄거나, 우주 밖에 끝없이 퍼져서 공간에 계시는 것으로만 믿었습니다.
이러한 공간 없이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허도 아닌 무無, 절대무絶對無라고 생각한 까닭이었으니 이를테면 물체가 공간에서 치워질 경우, 땅이건 물이건, 공기나 하늘이건 그 공간이 물체 없이 비어는 있어도 비워진 공간일 뿐, 말하자면 허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마음이 완악하던 나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하면서 무엇이든 어느 공간에 뻗거나 퍼지거나 엉기거나 부풀거나 함이 없이 용납되지도 용납될 수도 없는 것이면 전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에 비치는 영상을 마음의 상상이 따라가는 때문이었으니 이런 상상을 이뤄주는 정신력조차 물질이 아니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큰 무엇이 아니라면 현상을 이뤄내지도 못하거늘(창조자는 창조물보다 더 나아야 되기에–옮긴이).
이리하여 나는 내 목숨의 생명이신 당신을 개념할 때 홍대무변하사 우주의 전 용적에 사무치시되 무량무궁하사 그 밖에 계시는 줄 알았으니, 땅이며 하늘이며 모든 것이 당신을 간직하여 당신 안에 한정되나 당신은 그 어느 데에도 국한되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대지 위에 있는 기체가 햇살이 이를 꿰뚫을 때 장애가 되지 않고, 오히려 끊임도 찢김도 없이 오롯한 채로 햇살은 새어 나가듯, 천체와 기체와 바다뿐 아니라 땅의 물체까지도 당신 앞엔 거침이 없고, 따라서 최대·최소의 온갖 부분이 당신 현존을 위해서는 사무치지 아니함이 없어 당신은 손수 창조하신 모든 것을 안이나 밖이나 그윽한 입김으로 다스리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달리 생각할 능력이 없어 이렇게 추측했으나 그것은 틀린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한다면 더욱 큰 땅의 부분은 그만큼 당신을 차지하고, 더 작은 부분은 또 작은 대로 당신을 차지하게 될 것이니 만물이 당신으로 차 있는 모양이 이러할진대 코끼리의 몸집이 참새보다 크기에 당신을 용납하는 자리가 더 넓다고 해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몸집이 크대서 차지하는 자리가 그만치 크다 할진대 결국 당신 현존을 우주의 큰 부분에는 크게, 작은 부분에는 작게 나누는 셈이 되오니 이는 될 수 없는 일, 그러나 당신은 아직 내 어둠을 비춰주시지 않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