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적 문헌
19세기 말까지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로마서를 ‘서간–논문’으로 여겼다. 공개 서간의 형태로 쓰인 교리적 문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시한다. 로마로 곧 가겠다는 말은 바오로에게 구실에 불과하다. 그는 로마의 교회를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데다, 이 교회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아무런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바오로 자신도 “남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집을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15,20). 그렇기 때문에 이 공동체가 안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룰 필요도 없고, 논쟁에 뛰어들거나 자기 변론을 펼칠 이유도 없다. 그는 다만 로마 교회에 인사 서신을 보내는 기회를 이용할 따름이다. 이를 계기로 로마의 신자, 또 그들 외에 다른 모든 신자에게까지, 당시에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신앙의 주요 문제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미 갈라티아서에서 펼친 바 있는 내용을 차분히, 더욱 체계적으로 다시 밝힌다는 것이다.
사실 갈라티아서와 로마서가 비슷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두 서간에서 똑같이 바오로 신학의 주요 주제들이 다루어진다. 의화(義化)와 구원,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교 신앙,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의 예언적 의미 등이다. 그러나 이 두 서간 사이에 대립되는 사항들도 매우 뚜렷이 드러난다. 갈라티아서는 바오로가 감정에 이끌려 썼다는 느낌을 준다. 반면에 로마서는 차분한 분위기뿐만 아니라, 교육적인 어조, 철저한 고찰, 탁월한 관점이 인상적이다. 전하는 메시지는 같지만, 로마서에서는 그것이 더욱 폭넓게, 찬찬히, 그리고 아무런 논쟁의 여지 없이 설명되고 전개된다.
물론 바오로는 로마서 전체에 걸쳐,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어떤 특정 상대에게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형태를 견지한다. 그리스 말 본문은 말할 것도 없고 번역 성경이라도 한번 읽어 보면, 이 사도가 수사적(修辭的) 질문이라든가 감탄사나 감탄문, 그리고 삽입절 같은 것을 끊임없이 이용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는 그 어떤 서간에서보다도 이 로마서에서 이른바 연설 기법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예컨대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모릅니까?”, “아, 인간이여! ……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수사적 표현을 많이 쓴다는 것은, 바오로가 로마의 신자 가운데에서도 특정한 사람에게만 이 서간을 직접 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곧 바오로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그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형태로 서간 내용을 전개시켜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 대중 철학에서 이용하던 방식이다.
바오로의 서간 가운데에서, 로마서는 당시의 상황이나 시대와 가장 관련이 적고 가장 교리적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과거에는 이 서간을 일종의 ‘신학 개요(槪要)’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로마서를 ‘그리스도교 교리 요약’이라든가 바오로 신학의 종합으로 간주하기에는 빈틈이 너무나 많다. 우선 같은 시기에 쓰인 것으로 판단되는 코린토 서간들과 로마서 사이에, 문체만이 아니라 주제와 관련해서도 나타나는 현저한 차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들은 서로 밀접한 두 가지 내용이 주조를 이룬다. 곧 여기에서 바오로는 자기의 사도적 권위를 옹호하면서 코린토 교회의 일치와 성장을 위하여 애를 쓴다. 반면에 로마서에서는 마지막 몇 개의 장에서 실천적인 권고를 할 때 외에는, 적어도 명백한 어조로는 한 번도 교회가 문제로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성찬례에 관한 코린토 서간의 중대한 가르침에(1코린 11,17–34) 비길 만한 내용을 로마서에서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코린토 서간들에서는 성령이 여러 공동 은사와 교계 제도 직무의 근원으로 말해지지만, 로마서 8장에서는 자유와 개인 기도의 원천으로 부각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서에서도 코린토 서간들의 내용이 반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곧 ‘교회–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1코린 12,12–27; 로마 12,4–6), 그리고 ‘그리스도–제2의 아담’이라는 주제가 양쪽에서 다 다루어진다(1코린 15; 로마 5).
이렇게 볼 때, 로마서를 이 사도의 신학적 사상을 종합한 저술로 간주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현대적 의미로 그리스도교 조직 신학서와 같은 문헌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더욱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바오로 자신이 이 서간에서 두 번에 걸쳐 ‘자기의 복음’이라고 일컫는 내용(2,16; 16,25), 그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기쁜 소식의 핵심으로 여기는 내용을 설명한 서간이라는 말로 그 성격을 규정지을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