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문헌의 외적 동기

문헌의 외적 동기

로마서는 당시의 구체적 상황과 별다른 관련이 없는 일반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면서도 이 서간 역시 역사적 상황의 산물로, 당시의 교회에 제기된 가장 중차대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내놓고 있음도 사실이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교회’라는 말이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바로 이 주제가 로마서에서 펼쳐지는 사상의 근본 노선들이 합류하는 곳이다. 바오로는 역사의 그 순간에 교회를 위협하는 요소들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교회는 두 집단으로 갈라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한쪽에는 유다교 회당의 전통을 이어받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개종한 다른 민족 출신들이 있다. 이 이교 출신들은 과거 곧 유다교와 아무런 가시적 관련이 없는 사람들로서, 바오로는 자신을 바로 이들의 사도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갈라티아 교회와 코린토 교회를 뒤흔든 위기를 보면서, 바오로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로마서를 쓸 때, 그는 자기가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신자에게 읽히게 될 이 서간에서, 바오로가 왜 구약 성경과 복음에서 이루어지는 계시가 하나라는 사실, 이스라엘에게 내린 약속의 확실성, 구원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수행하는 역할 등을 강조하고 싶어 하였는지 이해하게 된다. 로마서에서는 이러한 교리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이 하나의 대칭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그 실천적인 면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곤궁을 풀어 주고 이교 출신 신자들과 팔레스티나 출신 신자들 사이의 연대성을 드러내는 모금 운동을 조직하는 바오로의 노력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하는 바와 같이, 서신을 직접 받는 사람에 따라 그 주제와 형식이 결정되는데, 로마서는 사정이 다르지 않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는 바오로의 작품 가운데에서 예외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서간은 바오로가 해당 교회의 구체적인 필요에 따라 글을 써 보내는 이른바 ‘상황 문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서 역시 57–58년에 로마 교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설명할 수 없는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학자가 이 방향으로 연구를 하였다. 그런데 바오로가 서간을 쓸 당시 로마 교회의 정확한 상황, 신자들의 구성, 그들의 성향 등이 우리에게까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학자들이 제시한 설명들은 연구 가설의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로마서 자체에서는 명확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한다. 바오로는 자기가 로마로 가는 까닭이 그곳 신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하려는’ 자기의 강력한 원의라고만 밝힌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를 유다교로 환원시키려는 자들이 갈라티아와 코린토에서 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자기들의 생각을 퍼뜨릴 것이라고 바오로가 걱정하지 않았나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일으킬 수 있는 소동에 대해서 바오로가 로마의 신자들을 미리 대비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로마서 자체를 놓고 볼 때, 바오로가 바로 그러한 의도로 이 서간을 썼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이와 관련하여 16,1–26 참조. 그러나 이 단락의 엄한 어조는 나머지 부분들의 부드러운 어조와 대립된다).

지금까지 제기된 모든 가설 가운데에서 한 가지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19세기 초엽부터 많은 학자들이 로마서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근본적으로 화해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로마의 유다인 거류민들은 매우 중요하였다. 이들은 49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다인 추방 칙령을 내리는 사태를 자초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선포로 야기된 혼란의 결과로 그리되었을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조치로 로마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컨데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또는, 프리스카)가 바로 그 때문에 코린토로 이주하였던 것이다(사도 18,2). 그런데 이 칙령은 오래지 않아 폐기됨으로써, 많은 유다인이 다시 로마로 들어가게 된다. 바오로가 로마서를 쓸 무렵에는 아퀼라와 프리스킬라도 이미 로마에 돌아가 있었다(16,3). 유다계 신자들이 로마로 다시 갔을 때, 비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경멸하는 고자세를 취한 것으로 추측된다(11,17–25; 14,3.10; 15,25–27 참조). 그때부터 로마 교회가 한쪽은 이교에서 개종한 이들, 다른 쪽은 유다교에서 개종한 이들로 갈라져, 이렇게 두 파로 깊이 분열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오로는 이 두 분파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또 둘이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그들을 인도하는 일에 자원하여 나섰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이 맞을 경우에 15,7의 말씀이 이 서간의 정점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이 구절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모든 내용은 바로 이 실천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가지 사실이 이 가설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어떤 학자는 바오로 사도가 줄곧 한쪽 시선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쪽 시선은 이교 출신 신자들을 향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실 이 서간에서는 ‘유다인’과 유다인이 아닌 다른 민족 사람들을 가리키는 ‘그리스인’, 그리고 이 명칭들과 유사한 용어들이 자주 사용된다(1,14–16; 2,9.10.25–27; 3,9–29; 4,9–12; 9,23; 10,12; 11,13–25; 15,8–12 등). 그리고 바오로의 다른 모든 서간에서 수신인을 가리키는 고정 표현인 “하느님의 교회”가 이상하게도 로마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에 그렇게 불릴 만큼 일치된 공동체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면 쉽게 이해된다. 끝으로 9장에서 11장까지 하느님의 백성, 그리고 이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하여 길게 이야기하는데, 이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아주 합당한 일로 인정된다.

이 가설은 최근에 다시 제기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논거로 뒷받침된다. 이 가설이 맞을 경우 (당시에는 물론 ‘교회 일치’라는 말이 없었지만) 로마서는 탁월한 ‘교회 일치’의 성격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흥미를 끌기는 하지만, 여전히 가설일 따름임을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로마 교회에 관하여 바오로 쪽에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나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가설을 확실한 것으로 단정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가설은 이 어렵고 신비로운 서간을 나름대로 강력하게 비추어 주고 또 이 서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