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의 구성

로마서의 구성

바오로의 모든 서간 가운데에서 로마서처럼 틀이 잘 짜여 있고 세심한 구상이 드러나는 인상을 주는 본문도 없다. 로마서 역시 바오로가 쓴 대부분의 다른 서간들처럼 서로 선명히 구분되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음을 모든 주석가가 인정한다. 곧 교리편과(1―11장) 권고 또는 훈계편이다(12―16장). 그러나 이 이상으로 서간의 구성을 확정 짓는 데에는 의견이 갖가지로 나뉜다. 어떤 학자들은 이 서간의 구조가 대화의 구조만을 보인다는 결론을 내놓기도 한다. 로마서는 유다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가운데에서 나온 글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서간이 확고한 바탕 위에서 신중하게 구성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그러면서도 문체상으로나 생각의 연계성 면에서 완전한 일관성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오로는 키케로와 같은 연설가도 저술가도 아니다. 그리고 바오로가 편지를 써 내려갈 때에 수사적(修辭的)으로 분출되는 여러 가지 내용이 일정한 단락들로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이 학자들에 따르면, 사도는 본디 죄(1장―3,20), 이어서 의화(3,21―4,25), 끝으로 성화(聖化)를 다루려고 하였다(5―8장). 그러나 이러한 가설에서는, 서간의 종결 부분이 교리편과 별로 관련이 없는 일련의 부록에 불과하게 된다. 새로운 연구들의 결과로 로마서의 다른 구조가 제시되는데, 이것이 사도의 핵심 구상에 더 가까운 것 같고 구약 성경 예언자들의 방식에도 더 부합하는 것 같다. 예언자들은 논리적 전개보다는 이른바 ‘집중적 반복’의 방식을 따른다. 최근에 제기된 로마서 구성 가운데 하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서간은 인류가 처한 곤궁과 함께, 이 복음이 곤궁을 쳐 이기는 승리를 연이은 네 단계로 서술한다는 것이다. 그 단계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하느님의 단죄 아래 이교인들과 유다인들이 겪는 곤궁과(1,18―3,20)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가 그분을 통하여 받는 의화이다(3,21―4,25). 둘째는, 첫 아담에 따른 인류 공통의 곤궁과(5,1–14)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는 연대를 통한 인류의 구원이다(5,15―6,23. 5장에서는 곤궁과 구원, 이 두 주제가 밀접히 뒤섞여 있다). 셋째는, 율법의 종이 된 인류의 곤궁과(7,1–25) 성령에 의한 인류의 해방이다(8,1–39). 넷째는,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야기된 이스라엘의 곤궁과(9,1―10,21) 유다인들과 다른 민족들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에게 궁극적으로 길이 열리는 구원이다(11,1–36). 이렇게 본 로마서의 구성은 아직도 가설의 수준이기는 하지만 이중의 특색을 지닌다. 먼저 이 구성은 네 차례에 걸친 곤궁과 구원의 서술이 다른 성격과 기원을 지닌 용어들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곧 첫째 서술은 법적, 둘째 서술은 성사적, 셋째 서술은 영적, 넷째 서술은 역사적 용어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구성은 9―11장이 어떻게 1―8장의 내용과 유기적으로 연계되는지도 보여 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구성은 두 가지 점에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러한 구성으로 9―11장이 서간의 전체 내용에 자연스럽게 합쳐지는데, 실제로 이 세 개의 장은 서간의 나머지 부분과 상대적으로 독립된 단락을 이루고 있다. 위의 구성은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9―11장은 본디 이 부분만 따로 작성하여 나중에 로마서 현재의 자리에 삽입하였다는 것이 매우 그럴듯하게 여겨질 정도로 하나의 통일된 단락을 형성한다. 1―8장의 근본 주제는 1,16–17에서 예고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신 새로운 의로움인데, 9―11장은 사실 이러한 1―8장에 필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 구성이 두 번째로 만족스럽지 못한 점은, 5장이 연결 고리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러 학자가 5장에서부터 어떻게 특별히 새로운 관점이 드러나는지를 강조해 왔다. 곧 5장에서부터는 의화가 이미 과거에 속한 일로, 완수된 사항으로 나타난다. 의화를 가리키는 동사들이 모두 단순 과거(그리스 말 문법 용어로는, 아오리스트)로 쓰인다. 5,2에서 다시 언급되는 “믿음”도 이제는 “희망”에 자리를 내준다. 그리고 5,11에서 8장까지의 근본 주제는 더 이상 의화가 아니라 삶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 가는 우리의 삶이 세례로 시작되는 것이다(6장). 그리고 성령의 은총과 생기를 부여하는 그분의 역동적 현존이, 우리가 영광을 누리시는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면서, 부활하신 이분의 천상 생명에 참여한다는 표징이다(8장). 1―8장의 내용은 이렇게 진전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현재의 서간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사도가 어려운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가끔 서로 교차하는 생각과 논증들을 한꺼번에 여러 방향으로 따라가기 때문이다. 사정이 어떠하든 간에, 네 개의 큰 단락으로 로마서의 교리 내용을 정리하여 제시하는 작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 관심을 기울인다. 곧 바오로가 어떻게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민족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번갈아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전념하는가, 또 그가 어떻게 마지막으로, 서간을 마무리하는 대권고에서(12,1―16,27)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일상 속에 살아가도록 그들을 권고하는가이다. 이 권고편의 주요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 대한 모든 욕심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의 이익을 추구하며 자기들 사이의 연대성과 다른 모든 사람과의 연대성을 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는 데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현세에서 역사의 완결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아주 불완전하게나마 그 완결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된다(13,11–14).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서의 이 다섯째 부분은 앞의 네 단락에 유기적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