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자비하심

하느님의 자비하심

사랑하는 어머니, 여기까지 제 살아온 이야기 같은 건 한마디도 없으니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갈 것인가 놀랍고 궁금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저에게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말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쓰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쓰려는 것은 이른바 제 삶의 전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저는 지금 지난 일을 돌아볼 수 있는 시기3 에 이르렀습니다. 제 영혼은 안팎으로 가득한 시련 속에서 단련되어 왔습니다. 이제 저는 비바람으로 억세어진 꽃처럼 머리를 들고, 제 마음속에 시편 23장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1–4)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시편 23,1–4)

3. 성녀는 수도 생활 7년차였던 1895년 1월에 이 글을 썼다. 아버지 루이 마르탱 씨가 별세한(1894년 7월 29일) 이듬해이다.

원장 수녀님, 수녀님과 함께 주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하게 된 것이 정말 행복합니다. 저는 당신만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꺾으신 작은 꽃[小花]의 내력을 쓰려고 합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샐 때가 많겠지만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엄마는 아기가 떠듬거리기만 할 때에도 마음으로 알아듣는 법이니 원장 수녀님께서도 제 마음을 알아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제 마음을 예수님께 바쳐 지금의 마음이 되게 하신 분이 원장 수녀님이시니까요!

꽃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꽃이라서 꽃인 것과 꽃이라서 예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말만 할 것 같습니다. 자기는 보기가 흉하고 향기도 없다든가, 해 때문에 향기가 이상하게 변했다든가, 비바람으로 대가 부러졌다든가 하며, 겸손한 척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라는 꽃도 예수님께서 아무 대가 없이 보살펴 주셨음을 알리게 된 것이 기쁘기만 합니다. 저에게 주님의 눈에 들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제 안에 있는 훌륭한 것은 모두 그분의 자비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맑고 고운 향기가 가득히 스며 있는 거룩한 토양에 싹 틔우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꽃에 앞서 여덟 송이 눈부신 백합을 피우신 분 또한 예수님이십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세상의 악취로부터 당신의 작은 꽃을 지키고자 하셨고, 꽃망울이 채 벌어지기도 전에 구원자인 그분께서 저를 가르멜 산으로 옮겨 심으셨습니다. 거기에는 이 꽃의 춘삼월 시절을 보살펴 주었던 두 송이 흰 나리 꽃이 벌써부터 향기롭게 피어 있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정원에 뿌리를 내린 지 7년이 흘렀고, 곁에는 나리꽃 세 송이가 한들거리며 향기를 뿜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또 한 송이 흰 나리꽃이 예수님 앞에 피어 있으며 이 모든 꽃들을 낳아 준 성스러운 두 줄기는 이제 천국에서 영원히 결합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지상에서 피지 못한 네 송이의 백합을 만났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유배지의 낯선 강변에 우리들 꽃을 오래 놔 두지 마시고, 어서 천국의 백합 줄기가 온전히 채워지기를 바랍니다!4

4. 이 비유는 부모님을 포함한 성녀의 온 가족을 뜻한다. 이 글을 쓸 무렵에는 가르멜에 있던 마리, 폴린, 셀린, 데레사 4명과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있던 레오니만 살아 남아 있었다.

어머니, 이상 하느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바를 압축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 자세한 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른 이들에겐 마냥 지루한 추억담일 수 있으나, 어머니께는 사실관계상 모성적 혼을 사로잡을 만한 부분이 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 겹치고 우리 모두를 똑같이 보살펴 주시는 아주 훌륭한 부모님 슬하에서 함께 자랐으므로 제가 더듬어 떠올리려는 기억은 어머니께도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아, 부모님께서 이 막내를 축복하시고 제가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혜를 잘 찬양할 수 있게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