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죽음

엄마의 죽음

엄마의 병에 관한 것은 사소한 것까지도 모두 눈에 선하지만 특히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몇 주 동안의 일이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셀린 언니와 저는 가엾게도 마치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처럼, 아침마다 우리를 데리러 온 사촌올케인 르리슈 부인17을 따라가서 온종일 올케네에서 지냈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아침 기도를 바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셀린 언니가 가는 도중에 “기도를 아직 드리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까?”라고 묻기에 “그럼!” 하고 제가 대답했습니다. 언니가 더듬더듬 올케 언니에게 그 이야기를 했는데, 르리슈 부인은 “그래, 그럼 하면 되지.” 하고는 커다란 방에 우리를 남겨 놓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때 셀린 언니가 저를 쳐다보며, “아! 다른 분들이 모두 우리 엄마 같지는 않구나. 엄마는 늘 기도를 이끌어 주셨는데!”라고 말했습니다. 친구들과 놀면서도 줄곧 엄마 생각이 나고 그리웠습니다. 어느 날 셀린 언니가 살구 한 개를 받아 와서는 “우리가 먹지 말고 엄마에게 갖다 드리자.”라고 소곤댔습니다. 아! 그러나 사랑하는 엄마는 이미 병이 너무 깊어져서 더 이상 이 세상의 과일은 먹지 못하셨습니다. 엄마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말씀하셨던 신비로운 포도주를 하느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마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17. 마르탱 씨의 조카며느리이다.

마지막 병자성사 때의 먹먹함 역시 가슴 깊이 남아 있습니다.18 저는 셀린 언니 옆에 앉고, 우리 다섯 명의 자매가 나이 순서대로 앉아 있던 것, 아빠가 흐느껴 우시던 것 등 여러 가지가 지금도 그대로 보이는 듯합니다.

18. 마르탱 부인은 1877년 8월 26일 일요일에 성체성사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 날, 아빠는 저를 팔에 안으시고 “자, 엄마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해 드리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무 말 없이 사랑하는 엄마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대었습니다. 저는 많이 울지도 않았고 가슴 벅찬 감정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보거나 듣고만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신경을 못 쓰는 통에 안 그랬으면 못 보게 했을 것들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거실에 반듯하게 둔 관의 뚜껑 쪽을 오랫동안 혼자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엄마 키에 맞게 작은 것이었지만 저는 훨씬 작았기 때문에 전체를 보려면 고개를 젖혀야 했습니다. 그것은 크고, 슬펐습니다. 그 후 15년이 지나 저는 또 다른 관 앞에 서게 되었는데, 그것은 즈느비에브 수녀님19의 것이었습니다. 엄마의 관이랑 비슷한 크기여서 새삼 어릴 적 일이 생각났고, 온갖 추억들이 연달아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관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어린 시절의 그날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때보다 자랐기 때문에 관이 작아 보였습니다. 이제는 고개를 젖히지 않아도 됐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고개를 높인 것은 지복의 천국을 우러러 묵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의 모든 시련은 끝나 있었고, 제 영혼의 겨울도 영원히 지나간 때였으니까요.

19. ‘리지외의 가르멜 여자 수도원’ 창립자 중 한 분인 성녀 데레사의 즈느비에브 수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