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가린 얼굴

베일에 가린 얼굴

담소 시간29에 성심聖心의 마리아 수녀와 함께 지난 시절의 여러 가지 일과 어린 시절의 추억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그때 저는 일곱 살에 보았던 그 환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본 것은 바로, 고령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가시는 아빠였습니다. 그 존경스런 얼굴과 백발이 된 머리에 영광스런 시련의 보를 드리우고 계셨던 것입니다.30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이 수난을 당하시는 동안 가려졌던 것처럼 그분의 충실한 종의 얼굴도 천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빛낼 수 있도록 고통을 당하시는 동안 가려져야만 했습니다.

29. 가르멜 수녀원의 관습에 따라, 축일에 수녀들은 따로 만나 담소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30. 아버지 루이 마르탱은 노년에 중풍과 뇌동맥 경화증이 발생하고 정신 장애까지 겹쳤다.

우리는 아빠에 대한 그 환시를 추억하면서,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때는 이미 아빠가 천국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고 계실 때였고, 아빠의 어린 여왕이 환시를 본 때는 착각은 할지언정 두려워할 줄은 모를 정도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위하여 영광스러운 미래를 계획해 그들에게 알려 주고, 그들의 몫이 될 값진 재산을 미리 준비하는 것을 즐겁게 여깁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큰 시련을 당하기 10년이나 전에 그것을 미리 보여 주셨고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늑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 하느님께서는 왜 그런 빛을 저에게 주셨던 것일까요! 왜 그분은 보고도 이해하지 못할 어린 나이의 아이에게, 또 만일 이해하였다면 괴로워 죽었을지도 모를 아이에게 보여 주셨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천국에서나 완전히 이해하고, 영원히 기릴 신비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인자하십니까! 당신께서는 어쩜 그렇게 우리가 딱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시련을 주십니까! 제가 지금 말한 바와 같이 그때는 미래에 닥칠 극심한 고통을 절대로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실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저는 벌벌 떨었으니까요. 하루는 아빠가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가셨는데 제가 바로 밑에 있으니까, “얘야, 저리 비켜라. 내가 떨어지면 너까지 깔린단다.” 하고 소리치셨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고 비키기는커녕 오히려 사다리에 더 붙어 서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아빠가 떨어지시더라도 적어도 돌아가시는 걸 보는 괴로움은 겪지 않겠지. 나도 아빠하고 같이 죽을 테니까!’ 제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했는지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아빠가 하시는 일은 모두가 감탄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아빠가 고견을 피력하실 때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천연덕스럽게 화답했습니다. 아빠가 정부의 고관들에게 그 좋은 의견을 들려 주신다면 그들은 아빠를 틀림없이 국왕으로 삼을 것이고, 그러면 프랑스는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질 거라고. 그러나 진짜 속마음은, 저만 아빠를 잘 아는 것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프랑스와 나바르’의 국왕이 되셨더라면 모든 왕들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불행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저 혼자만의 임금님으로 남아 계시지는 않았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