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가린 얼굴
담소 시간29에 성심聖心의 마리아 수녀와 함께 지난 시절의 여러 가지 일과 어린 시절의 추억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그때 저는 일곱 살에 보았던 그 환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본 것은 바로, 고령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가시는 아빠였습니다. 그 존경스런 얼굴과 백발이 된 머리에 영광스런 시련의 보를 드리우고 계셨던 것입니다.30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이 수난을 당하시는 동안 가려졌던 것처럼 그분의 충실한 종의 얼굴도 천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빛낼 수 있도록 고통을 당하시는 동안 가려져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아빠에 대한 그 환시를 추억하면서,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때는 이미 아빠가 천국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고 계실 때였고, 아빠의 어린 여왕이 환시를 본 때는 착각은 할지언정 두려워할 줄은 모를 정도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위하여 영광스러운 미래를 계획해 그들에게 알려 주고, 그들의 몫이 될 값진 재산을 미리 준비하는 것을 즐겁게 여깁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큰 시련을 당하기 10년이나 전에 그것을 미리 보여 주셨고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늑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 하느님께서는 왜 그런 빛을 저에게 주셨던 것일까요! 왜 그분은 보고도 이해하지 못할 어린 나이의 아이에게, 또 만일 이해하였다면 괴로워 죽었을지도 모를 아이에게 보여 주셨을까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천국에서나 완전히 이해하고, 영원히 기릴 신비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아,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인자하십니까! 당신께서는 어쩜 그렇게 우리가 딱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시련을 주십니까! 제가 지금 말한 바와 같이 그때는 미래에 닥칠 극심한 고통을 절대로 상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실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저는 벌벌 떨었으니까요. 하루는 아빠가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가셨는데 제가 바로 밑에 있으니까, “얘야, 저리 비켜라. 내가 떨어지면 너까지 깔린단다.” 하고 소리치셨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고 비키기는커녕 오히려 사다리에 더 붙어 서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아빠가 떨어지시더라도 적어도 돌아가시는 걸 보는 괴로움은 겪지 않겠지. 나도 아빠하고 같이 죽을 테니까!’ 제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했는지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아빠가 하시는 일은 모두가 감탄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아빠가 고견을 피력하실 때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천연덕스럽게 화답했습니다. 아빠가 정부의 고관들에게 그 좋은 의견을 들려 주신다면 그들은 아빠를 틀림없이 국왕으로 삼을 것이고, 그러면 프랑스는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질 거라고. 그러나 진짜 속마음은, 저만 아빠를 잘 아는 것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프랑스와 나바르’의 국왕이 되셨더라면 모든 왕들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불행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저 혼자만의 임금님으로 남아 계시지는 않았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