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사랑
산책을 마치면(산책 중에 아빠는 늘 제게 작은 것이지만 선물을 사 주셨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숙제를 했습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줄곧 뜰에 나가 아빠 곁에서 뛰어놀았습니다. 저는 인형을 갖고 놀 줄은 몰랐으니까요. 제가 제일 좋아하던 놀이는 땅에서 주운 작은 나무 열매와 껍질로 약을 달이고, 작은 잔에 담아서 아빠에게 갖다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착한 아빠는 만사를 제치고, 웃으시며 마시는 시늉을 하셨습니다. 잔을 제게 돌려주시기 전에 아빠는 차가 남은 척하시며 버릴까 묻곤 하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렇게 하시라고도 했지만, 보통은 그 귀중한 약차를 여러 번 드릴 생각으로 다시 가져왔습니다.
저는 아빠가 마련해 주신 제 정원에 조그만 꽃들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정원 담벼락의 오목한 곳에 조그만 제단을 꾸미고 놀기도 했습니다. 제단을 다 완성하면 아빠에게 달려가서 눈을 감게 하고 제가 뜨라고 할 때까지는 뜨지 마시라고 하며 모시고 왔습니다. 그러면 아빠는 눈을 감고 제 작은 정원까지 따라오셨습니다. 도착하면 “아빠 눈 떠!” 하고 소리쳤습니다. 아빠는 제 기분을 좋게 해 주시려고 제게는 나름의 걸작품이던 그 제단을 황홀경에 빠진 듯 칭찬하셨습니다! 이렇게 기억에 남아 있는 수많은 추억을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아, 아빠가 당신의 작은 여왕에게 쏟아 주셨던 애정을 어떻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지 생각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친애하는 폐하’25께서 저를 데리고 낚시하러 가시는 날은 행복하고 신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시골과 꽃과 새 같은 것들을 몹시 좋아했으니까요! 어떤 때는 저도 작은 낚싯대로 고기를 낚으려고 해봤으나, 그보다는 꽃이 핀 풀밭 위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명상이 무엇인지 아직 몰랐지만, 어느덧 제 영혼은 깊은 생각에 잠겨 참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 바람의 속삭임 같은 것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때로 어렴풋한 군악 소리가 들려 감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이 귀양지처럼 여겨지고 하늘나라를 꿈꾸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시간은 후딱 지나가 버리고, 우리는 집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제가 작은 바구니에 들고 갔던 샌드위치 도시락을 먹었는데, 모양이 망가지고 잼은 색이 바래 있었습니다. 원장 수녀님께서 얼마나 맛있게 만들어 주셨던 점심인데, 빵은 푸석해지고 선홍색이던 잼은 연분홍빛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또 슬프게 느껴지고, 구름 한 점 없는 기쁨이란 천국에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름’이라는 말이 나오니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하루는 시골의 청명한 하늘이 구름으로 캄캄해지더니 곧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번개가 검은 구름을 가르며 떨어졌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천둥도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섭기는커녕 도리어 몹시 좋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제 곁에 계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빠는 당신의 작은 여왕만큼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폭우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들길에 젖은 풀잎이며 꽃잎들이 지나가는 제 온몸에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흩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빠는 당신의 막내딸에게 물방울이 튀는 것이 걱정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빠는 저를 들쳐 업으시고 낚시 연장까지 들고 큰길까지 나오셨습니다.
산책하는 동안 자주 아빠는 우리와 마주치는 걸인들에게 제가 적선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루는 양쪽으로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걸어가는 불쌍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제가 동전 한 닢을 주려고 그에게 다가갔더니 그는 동냥을 받을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고 느끼는 듯, 서글프게 웃으며 저를 바라보고 동전을 거절했습니다. 그때의 제 기분이란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분을 위로하고 도우려 한 것인데, 오히려 그분을 부끄럽고 괴롭게 만든 것 같았습니다. 그 가엾은 노인도 제 생각을 짐작했던지, 저를 돌아보고 웃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때 마침 아빠가 사 주신 과자가 한 개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그분에게 주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너무 안돼 보여, 그분께 꼭 무엇인가를, 거절하지 못할 어떤 것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 첫영성체하는 날에는 무슨 은혜를 청하든 다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났습니다. 그 생각에 마음이 진정되고, 저는 겨우 여섯 살이었지만 속으로 ‘첫영성체하는 날에 그 가엾은 분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나 첫영성체 날에 이 결심을 지켰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받는 당신의 지체肢體인 그분을 위해 당신께 기도드릴 생각을 제게 미리 넣어 주셨으니, 이 기도를 분명히 들어주셨으리라 믿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