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우는 아이
셀린 언니와 가까웠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아, 모두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리지외로 이사 온 후에 우리 둘의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언니는 왈가닥 셀린이 되었는데, 저는 말수가 줄고 툭하면 우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 없이 우리 둘 사이의 우애는 점점 더 깊어 갔습니다. 가끔 말다툼도 했지만 사소한 것들이었고 생각은 언제나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셀린 언니는 한번도 저를 괴롭힌 적이 없으며, 마치 햇빛처럼 언제나 저를 기쁘게 해 주고 보듬어 주었습니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 셀린 언니는 아주 용감하게 제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제가 아플 때 어떨 때는 귀찮다는 생각이 들 만큼 보살펴 주었습니다. 언니가 혼자 노는 거 보면 재밌었는데, 언니는 우리 인형들을 모두 줄지어 놓고 진짜 선생님처럼 수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종종 언니 인형들은 소중하게 대하면서 제 인형은 나쁜 짓을 했다며 문밖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또 언니는 교실에서 방금 들었다며 온갖 새로운 것들을 알려 주었는데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언니가 지식의 샘처럼 우러러 보였습니다. ‘셀린의 아기 동생’이란 별명도 얻게 되었는데, 언니가 제게 화가 났을 때에는 “이제부터 너는 내 아기 동생이 아냐. 그리고 이 말은 절대 취소하지 않을 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눈물을 흘리며 저를 계속 아기 동생처럼 생각해서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언니는 금세 저를 끌어안고 용서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를 위로하려고 자기 인형 하나를 집어 인형에게 “아가야, 네 이모에게 뽀뽀해 주렴.” 하고 말했습니다. 한번은 인형과 어찌나 열렬히 입을 맞추게 되었던지 양팔이 제 콧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셀린 언니는 영문을 모르고 코에 인형을 달고 있는 저를 멍하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모인 저는 인형 조카의 지나치게 정다운 포옹을 풀고, 이 우스꽝스런 일에 실컷 웃어 댔습니다.
가장 재미있던 추억은 우리가 바자회 가게에 가서 새해 선물을 사던 일입니다. 우리는 서로 무엇을 사는지 비밀로 하며 물건을 샀습니다. 동전 열 개로 적어도 대여섯 가지 물건을 골고루 사야 했는데, 누가 가장 멋진 것들을 사느냐가 제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 물건들을 사다 놓고 서로 좋은 선물을 줄 생각에 가슴 설레며 설날을 기다렸습니다. 둘 중 먼저 잠이 깬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달려가서 새해를 축하하고 선물을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우리는 동전 열 개 값어치만큼의 보물들로 황홀해했습니다.
이 작은 선물들로도 우리는 외삼촌이 주는 훌륭한 선물 못지않게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즐거움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아빠의 목을 껴안을 기회만 서로 노리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방에서 나오시자마자 온 집 안에 환호 소리가 넘쳤고 아빠는 우리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시며 행복해하셨습니다. 마리 언니와 폴린 언니가 동생들에게 주는 선물들도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매우 기뻤습니다. 아, 우리가 작은 것에도 감동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어리고 순수했던 것이겠지요! 우리의 마음은 아침 이슬을 받아 행복하게 피어나는 꽃처럼 싱싱하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산들바람이 불어 오면 온 꽃송이마다 꽃잎이 나부끼듯, 한 사람에게 괴로움이나 즐거움인 것은 다른 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진정 같은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셀린 언니가 첫영성체를 받던 그 좋은 날38에 특히 더 느꼈습니다. 저는 그때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일곱 살 어린이였지만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께서 셀린 언니에게 첫영성체 준비를 시켜 주시던 일은 아직도 마음속에 달콤한 추억으로 간직돼 있습니다. 원장 수녀님께서는 매일 저녁 셀린 언니를 당신 무릎 위에 앉히시고 언니가 하게 될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저도 첫영성체를 준비해야겠다는 열망에 듣고 있으면, 제게는 아직 멀었다고 나가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너무 답답해서, 하느님 모실 준비하는 데 4년이 뭐가 멀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