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발치에서
교황님의 미사에 이어 감사의 미사가 있었고, 그다음에 알현이 시작되었습니다. 레오 13세 교황님은 하얀 수단과 카마이86를 입고 작은 모자를 쓰고 높은 안락의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 주위에 추기경, 대주교, 주교들이 서 계셨지만 그들은 한 무리의 높으신 분들일 뿐, 저는 교황님께만 열중해 있던 터였습니다. 우리는 줄을 서서 교황님 앞을 지나갔는데, 순례자는 각각 레오 13세 교황님의 손과 발에 입을 맞추고 나서, 교황님의 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친위병 두 명이 의식에 따라 순례자에게 손을 대어 일어나게 했습니다. 교황님의 방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는데, 막상 교황님 오른편에 ‘레베로니 총대리님’이 서 계신 것을 보니 기가 죽었습니다. 바로 그때, “알현이 너무 길어지니 교황님께 말씀드리는 것을 금한다.”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셀린 언니의 생각을 알려고 돌아봤더니 언니는 “말씀드리렴!” 하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에 저는 교황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발에 입 맞추어 드리자, 교황님께서 저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교황님의 손에 입 맞추는 대신에 제 손을 마주 잡고 눈물 맺힌 얼굴을 들어 교황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교황님, 큰 은혜를 청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자 교황님께서는 당신 얼굴이 제 얼굴에 거의 닿을 만큼 제게 머리를 숙이셨습니다. 그 검고 그윽하신 눈이 제게 멈추어 영혼 속까지 꿰뚫으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겨우 용기를 내어 “교황 성하, 성하의 금경축 기념으로 제가 열다섯 살에 가르멜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아마 제 목소리가 감격으로 인해 떨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놀라움으로 불만스럽게 저를 바라보고 계시던 레베로니 총대리님에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걸.”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만일 이때 하느님께서 허락하셨다면, 레베로니 총대리님이 제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제게 위로보다는 십자가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성하, 이 아이는 열다섯 살에 가르멜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신부와 주교들이 지금 이 문제를 심사하는 중입니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아! 그래, 그럼 그분들이 하라는 대로 하거라.” 하고 교황님께서는 저를 다정하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손으로 교황님의 무릎을 짚고, 마지막 힘을 다해서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교황 성하! 성하께서 좋다고 허락하시면 모든 이가 따를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저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시더니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좋아…….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들어가게 될 테지……!” (그분의 말씀이 어찌나 제 마음을 파고드는 듯하고 신념에 차 있던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다정하신 교황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가 생겨 다시 말씀을 드리려고 했더니, 친위병 둘이 일어나라고 저를 살짝 건드렸습니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들이 제 팔을 붙잡았고 레베로니 총대리님도 거들어서 저를 일으켰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성하의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꼼짝도 않고 있었으므로, 교황님의 발치에서 저를 억지로 떼어 가야 했던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붙들려 나갈 즈음에 교황님은 당신 손을 제 입술에 갖다 대시고 다시 손을 들어 강복해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눈물에 젖어 있었으므로 레베로니 총대리님은 바이외에서 보셨던 ‘다이아몬드’를 다시 볼 수 있으셨습니다……. 친위병 두 사람이 저를 문까지 끌어다 놓으니, 또 다른 친위병 한 명이 와서 레오 13세 교황님의 메달을 제게 주었습니다. 바로 제 뒤를 따르고 있던 셀린 언니는 지금 말씀드린 모든 장면을 낱낱이 다 보았습니다. 언니는 저만큼이나 흥분해 있었지만, 용기를 내어 교황님께 가르멜을 위해서 강복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레베로니 총대리님이 “가르멜은 벌써 강복을 받았다.”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도 “그래! 벌써 강복했단다.” 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빠는 우리보다 먼저87 다른 남자들과 함께 교황님을 알현하셨습니다. 레베로니 총대리님이 아빠에게는 친절하셔서 ‘가르멜 수녀 둘의 아버지’라고 소개하셨다고 합니다. 교황님께서도 특별히 더 친절하게 사랑하는 저의 임금님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며, 당신께서 성스럽게 대행하고 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비로운 표징’을 새겨 주시는 듯 보였다고 합니다. 아! 지금은 천국에 계신, 가르멜의 수녀 넷을 딸로 가지신 아빠의 이마에 놓인 것은, 아빠의 고난을 예언하는 교황님의 손이 아닙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의 머리를 빛나게 하는 것은 ‘동정녀들의 정배’시며 영광의 임금이신 분의 손이었습니다. 그 거룩한 손은 당신께서 영화롭게 하신 이의 이마에 영원히 머무를 것입니다!
아빠는 제가 온통 눈물에 젖어 알현장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매우 슬퍼하시며 갖은 방법으로 어떻게든 저를 위로하려 하셨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수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기 때문에 마음속 깊이 큰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아주 깊숙이 숨어 있었고, 제 마음에 꽉 찬 것은 슬픔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셨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당신의 존재를 알려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날도 해가 비칠 기미도 없이, 이탈리아의 곱고 푸른 하늘은 검은 구름에 뒤덮여 저와 함께 울고 있었습니다……. 아,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제 여행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더 이상 여행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저는 그때 교황님의 마지막 말씀에서 위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말씀은 진실한 예언이 아니었습니까? 모든 장해를 물리치고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은 과연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당신 뜻을 좇도록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