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
이제는 로마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만 남았습니다. 로마는 여행의 목적지였고, 위로를 얻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십자가를 만났던 곳입니다. 로마에 이르렀을 때는 한밤중이었습니다. 우리는 잠이 들었다가, “로마, 로마.” 하고 역무원들이 외치는 소리에 깨었습니다. 꿈이 아니라, 정말 로마에 도착했습니다!83
첫날은 시내 밖에서 보냈는데, 그때가 아마 제일 즐거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성밖에는 모든 고적이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는데, 반대로 로마 시내의 호텔이나 상점들 앞에 서 있으면 마치 파리에 온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로마 외곽의 시골길을 걸은 것은 아주 달콤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우리가 방문했던 곳들을 상세히 쓴 책들이 많이 있으니 여기서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제가 깊은 인상을 받았던 곳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중에서도 ‘콜로세움Colosseum’을 보고 기쁨에 몸이 떨렸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피를 흘린 싸움터를 마침내 본 것입니다. 저는 즉시 순교자들로 거룩하게 된 땅에 입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콜로세움에 대한 그런 기대는 곧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가운데에 유적의 잔해가 무더기로 쌓여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접근하지 못하게 울타리를 쳐 놓았기 때문에, 일행들은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누구 이 폐허 속을 뚫고 내려가 보려 하는 사람조차 하나 없었습니다. 콜로세움 경기장에 내려가지 않는다면 왜 로마까지 왔겠습니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미 안내자의 설명도 들리지 않았고 다만 경기장에 내려가겠다는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했습니다. 거기서 일하는 어떤 분이 사다리를 갖고 지나가시는 것을 봤는데 빌려 달라는 말이 입술까지 나왔지만, 겨우 참았습니다. 말을 꺼냈다면 저를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가 계속 예수님의 무덤 곁에 남아서, 몸을 굽혀 안을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두 분의 천사를 뵈었다는 말이 «성경»에 있지요(요한 20,11–12 참조). 제 소원을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 식으로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순교터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기웃거렸습니다. 끝내 천사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대신 내려갈 만한 틈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좋아서 셀린 언니에게 “언니, 여기 봐,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울타리까지 쌓여 있는 잔해물들을 언니와 함께 뛰어넘고, 발아래 잡동사니들을 밟으며 내려갔습니다.
아빠는 우리의 대담한 모습에 놀라시며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두 도망자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이 위험한 상황에서 더 용기가 솟는 것처럼, 위험이 더해갈수록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나가는 기쁨도 더 커졌습니다. 셀린 언니는 역시 저보다 주의가 깊어서 안내자의 설명을 잘 들어 두었던 터라, 십자 모양으로 조그만 돌을 깔아 놓은 자리가 순교자들이 싸우던 곳임을 기억하고 그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그 거룩한 땅에 무릎을 꿇었을 때, 우리는 한마음이 되어 같은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어서 그리스도인들의 피로 붉게 물든 땅에 입술을 대었을 때, 제 가슴은 크게 뛰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위해 순교자가 되고자 하는 은혜를 구했는데, 허락되었음이 마음속 깊이 느껴졌습니다. 이 모든 일이 잠깐 사이에 다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돌을 몇 개 주워서, 다시 위험한 길을 지나 처음 넘어왔던 무너진 틈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아빠는 우리가 큰 행복에 취해 있는 것을 보시고 꾸중을 내릴 수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저는 우리의 용감한 행동에 아빠가 자부심을 느끼시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우리보다 멀리 가 있던 일행들은 안내자가 가리키는 작은 주춧돌과 멋진 아치형 문을 바라보는 데 정신이 팔려 우리가 없어졌던 것도 몰랐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확실하게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내자도 다른 일행들도 우리 마음에 넘치는 기쁨을 알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