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얼굴

거룩한 얼굴

가르멜 동산으로 옮겨 심어진 어린 꽃은 십자가의 그늘에서 활짝 피어났습니다. 주님의 눈물과 성혈을 달콤한 이슬로, 눈물로 덮인 공경하는 얼굴을 태양 삼아……. 그때까지 저는 성스러운 얼굴 안에 감추어 있는 보배의 가치를 헤아리지 못했는데,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께서 이 보배의 가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매 가운데 제일 먼저 수도원에 들어오신 것처럼, 우리 정배의 얼굴에 감추어진 사랑의 신비를 제일 먼저 깊이 깨달으신 분도 당신이셨습니다. 당신의 가르치심으로 저도 ‘참된 영광’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이 너를 몰라주고 남이 너를 하찮게 여기는 것을 오히려 더 좋아해야”97 하고, “자기를 천하게 여기고 남에게 업신여김 받기를 원하는 것”98만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천상에 왕국을 가지신 분이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 제 얼굴도 예수님의 얼굴과 같이 남들이 보면 눈을 가리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만 받는 것이(이사 53,3 참조)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저는 괴로움을 당하고 잊혀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97. «준주성범» 1권 2,3

98. «준주성범» 2권 12,9

주님께서 저를 인도해 주신 길은 항상 얼마나 인자한 길이었는지요. 제게 어떤 바람을 품게 하시면, 언제나 그것을 꼭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쓰디쓴 잔도 제게는 달게 느껴졌습니다.

5월에 마리 언니의 서원식과 착복식이라는 즐거운 축제가 있었는데, 이 ‘막내둥이’는 ‘큰언니’의 결혼 날에 화관을 씌워 드리는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날이 지나자 바로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지난해 5월에 아빠가 다리에 중풍을 앓으셔서, 우리는 매우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임금님은 강한 체질로 금방 병을 이기셨고, 우리도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여행하는 동안 아빠가 쉽게 피곤해하시며 예전만큼 유쾌하지 못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특히 제가 유심히 본 것은 아빠가 성덕의 길로 나아가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을 본받으신 아빠는 타고난 괄괄한 성격을 조절하실 수 있게 되어, 마치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천성을 가진 분처럼 보였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 사물로부터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현세의 고난을 쉽게 극복함으로써 하느님의 충분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매일 성체를 조배하는 동안 때때로 아빠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고 얼굴에는 하늘의 행복과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레오니 언니가 성모 방문 수녀회에서 나왔을 때도 아빠는 괴로워하지 않으셨고, 사랑하는 딸에게 성소를 내려 달라고 기도한 것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신 데 대해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딸을 찾으러 가시는 것에 오히려 기쁜 얼굴을 하셨습니다. 아빠는 당신의 어린 여왕과 헤어지실 때도 깊은 신심으로 참으시며 저와의 작별을 다음과 같은 말로 알랑송의 당신 친구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친애하는 형들, 내 작은 여왕 데레사는 어제 가르멜에 들어갔다네……! 오직 하느님만이 이러한 희생을 요구할 수 있으실걸세…….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말게나. 내 마음엔 기쁨이 차고 넘친다네.”

이처럼 충실한 종이 일생의 갚음을 받아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이신 천국의 임금님에게 주신 상에 버금가는 것을 저의 임금님에게 주셔야만 했습니다……. 아빠는 하느님께 제대 하나99를 바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제물은 흠 없는 어린양과 함께 봉헌되도록 선택된 당신 자신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원장 수녀님, 1888년 6월, 특히 24일에100 우리의 고통이 얼마나 컸습니까. 이 기억은 우리의 마음속에 너무도 생생하게 새겨져 있어서, 굳이 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 닥친 시련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99. 리지외에 있는 ‘생피에를 성당’의 대제대를 말한다.

100. 1888년 6월 23일 토요일에 마르탱 씨는 심한 뇌동맥 경화증에 걸려 아무도 모르게 집을 떠났다. 그러다가 7월 27일에 르아브르에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