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창조된 지성이 하느님을 그 본질에 있어서 볼 수 있는가

[제1절]

창조된 어떠한 지성도 하느님의 본질을 그 본질에 있어서 볼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실 크리소스토무스는 「요한복음서」 제1장 제18절의,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를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천사들과 대천사들도, 하느님인 바 그 자체를 보지 못했다. 그 본성상 창조적인 것이 어떻게 비창조적인 것을 볼 수 있겠는가.” 또한 디오니시우스도 「신명론」 제1장에서 하느님께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각도 표상도 의견도 지식도 그에게 도달할 수 없다.”

2. 그 밖에도 모든 무한한 것은 그런 것인 한 알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무한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 자체로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3. 그 밖에도 창조된 지성은 존재하는 것[存在者]에 대해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성이 파악하는 첫 것은 유다. 그런데 하느님은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들을 초월하여 있다. 이것은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가지적(可知的)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지성을 초월한다.

4. 그 밖에도 인식하는 자에게는 인식되는 것에 대해 어떤 비례(比例, 대비)도 없다. 그것은 양자는 무한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된 지성은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두 권위자는 파악의 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즉 디오니시우스는 앞에서 인용된 말들 직전에, “하느님은 모든 것들에게 보편적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또한 감각도 그에게는” 운운한다. 크리소스토무스도 앞에서 말한 것들 조금 뒤에서, “본다는 것은 여기서 성부가 성자께 대해 갖는 것과 같이 그렇게 확실한 성부의 관조(觀照)와 파악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질료측에서 무한한 것, 즉 형상에 의해 완성되지 않은 무한은 그 자체에 있어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식이 형상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형상측에서 무한한 것, 즉 형상이 질료에 의해 제한되어 있지 않은 관점에서의 무한한 것은 그 자체로 최고도로 가지적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무한하다는 것은 앞에서 명백히 말한 바와 같이 전자의 의미에서가 아니다.

셋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非存在者]이라고 함은 하느님이 어떤 모양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자기 존재인 것이니 모든 존재자를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귀결되는 것은 하느님은 결코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식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넷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비례 혹은 대비는 두 가지로 사용된다. 그 하나는, 어떤 양(量)의 다른 양에 대한 일정한 관계가 대비라고 불린다. 이런 의미로 2배, 3배, 균등 등이 대비(비례)의 종(種)이다. 또 다른 하나는, 어떤 것의 다른 것에 대한 임의의 관계가 비례라고 불린다. 이런 의미로 피조물의 하느님께 대한 비례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결과가 원인에 대한 것과 같이, 또 가능태가 현실태에 대한 것과 같은 관계에 있는 한 그런 것이다. 이런 의미로, 창조된 지성이 하느님을 인식하기 위해 비례된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