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세 위격은 하나의 본질의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힐라리우스는 「시노드에 대하여」[1]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실체적으로는 셋이지만 합치로써는 하나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실체는 그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세 위격은 하나의 본질의 것이 아니다.
2. 그 밖에도 디오니시우스가 그의 「하느님의 명칭들에 대하여 ― 神名論」 제1장[2]에서 명백하게 하는 바와 같이 성서의 권위로 표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주장될 것이 아니다.
3. 그 밖에도 하느님의 본성은 그 본질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 위격은 하나의 본성의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4. 그 밖에도 일반적으로 위격이 본질의 것이라는 데는 익숙해 있지 않고 오히려 본질이 위격의 것이라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므로 세 위격이 하나의 본질이라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5. 그 밖에도 아우구스티누스[3]는, 우리가 세 위격이 하나의 본질로부터의 것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본질과 위격이 다른 것으로 오해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전치사들이 (다른 것에로의) 이행인 것과 같이 사격(斜格)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같은 이유로 세 위격이 하나의 본질의 것이라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6. 그 밖에도 오류의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에 있어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세 위격이 하나의 본질의 것인가 혹은 하나의 실체의 것인가를 말할 때 오류의 계기가 주어진다. 그것은 힐라리우스가 「시노드에 대하여」[4]라는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성부와 성자의 하나의 실체가 말해질 때 그것은 두 호칭을 갖는 하나의 自存하는 것을 표시하든가 아니면 하나의 실체가 나누어져 둘의 불완전한 실체들을 만든 것을 표시하든가 혹은 또 선행하는 제3의 실체가 있는데 그것이 두 실체에 의해 찬탈되어 취해진 것을 표시하든가이다.” 그러므로 세 위격이 한 실체의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여기서 실체는 휘포스타시스로서 취해지는 것이고 본질로서 취해지는 것은 아니다.
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세 위격이 하나의 본질의 것이라는 것이 성서 안에서 그 말대로의 표현으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발견된다. 예컨대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10,38; 14,10) 등과 다른 많은 곳에서 같은 것이 발견된다.
셋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본성은 행위의 근원을 지시하지만 본질은 존재로부터 말해지기 때문에 어떤 행동 안에서 일치하는 것들 예컨대 모든 뜨겁게 하는 것은 하나의 본성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도 그 존재가 하나가(즉 존재가 같은 것이) 아닌 한 하나의 본질(즉 같은 본질)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 위격이 하나의 본성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본질의 것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의 一性 즉 一體性이 더 잘 표현된다.
넷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즉 독립적으로 취해진 形相은 그 形相이 속해 있는 것의 것으로 표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베드로의 德’과 같은 것이 그런 경우이다. 이와는 逆으로 어떤 形相을 갖는 사물이 그 形相의 것으로 표시되는 것은, 우리가 그 形相을 규정하고 한정하고자 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 두 가지 속격이 요구된다. 그 하나는 形相을 표시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형상의 규정(특정화)을 표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베드로는 큰 덕행의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혹은 또 두 가지 속격의 힘을 갖는 하나의 속격이 요구된다. 예컨대 “저 사람은 피의 사나이다.”, 즉 “많은 피를 흘리게 하는 자.”라고 할 때가 그런 경우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본질이 위격과의 관련에서 形相으로 표시되기 때문에 위격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그 逆(즉 본질의 위격)은 적절치 못하지만 본질을 한정하기 위해 어떤 것이 첨가되는 경우는 다르다. 예컨대 성부는 하느님의 본질의 위격이다,라든가 세 위격은 하나의 본질의 것이다,라는 경우가 그렇다.
다섯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에서부터’ 혹은 ‘에서’의 전치사는 形相因의 관계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인(能動因, 産出因, 成因)[a]이나 질료인 관계를 지시한다. 이런 후자들의 경우는 어떤 것에 있어서이든 원인들은 그것들의 원인들인 것들로부터 구별된다. 사실 어떤 것도 자기의 질료일 수 없고 어떤 것도 자기의 능동적(작용적) 근원일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이 자기의 形相인 것은 있다. 이런 것은 모든 비질료적 사물들에 있어서 명백한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질을 形相의 관계 안에(즉 형상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표시하여 세 위격이 하나의 본질의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본질이 위격과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 위격이 같은 본질에서부터 있는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런 경우 그런 것이 제시될 것이다.
여섯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힐라리우스가 「시노드에 대하여」[8]라는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거룩한 것들이 어떤 사람들로부터 거룩한 것들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거룩한 것들이 아니어야 한다면 이런 것은 거룩한 것들에 대해 나쁘게 편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또 이렇게 호모우시온을 오해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나에게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 “그러므로 낳아진(출생된) 본성의 고유성에 근거하여 분할이나 합일이나 공통성에 근거하지 않는 하나의 실체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9]